다시 보는 "파이란"


[http://www.failan.co.kr/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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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란 (failan)

세상은 날 삼류라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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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눈길이 닿지 않던 팍팍한 일상의 뒷길…그 곳에서 이제 사랑이 시작된다.

가진 거라곤 몸뚱아리 하나와 꿈 같은 희망 하나 뿐인 남자…이강재

동네 오락실 한구석, 담배하나 꼬나물고 괜한 공갈만 일삼는 사내. 뒷골목 동기인 친구는 어엿한 조직의 보스가 돼있지만 그에게 떨어진 건 작은 비디오가게 하나 뿐이다. 하지만 주먹만큼이나 마음도 약해 '삐리'들을 상대로 하는 포르노 사업도 늘 위태롭기만 하다. 덕지덕지 달린 눈꼽에 벌겋게 충혈된 눈, 그런 그의 눈이 반짝 빛을 발하는 건 정신없이 돌아가는 오락기 앞에서 뿐이다.
…그래서 그는 그냥 건달도 아닌 '삼류'건달이다.

어느날 우연찮은 사건에 휘말려 조직의 보스와 인생을 건 계약을 하게 되는 강재. 꿈에 그리던 금의환향을 위해 그는 어려운 결심을 하게 되는데…

그런 그에게 영문 모를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강재씨…고맙습니다. 강재씨 덕분에 한국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사람들 모두 친절합니다. 그치만 가장 친절한 건 당신입니다. 왜냐하면 나와 결혼해 주셨으니까요…”

결혼 …아내…파이란? 인간 이강재에게도 아내가 있었다….
그런 혼란스러움을 뒤로 돈 몇 푼에 위장결혼을 해 준 기억이 떠오르는 강재. 한 장의 편지에서 전해지는 낯모를 따스함은 강재를 낯선 인연의 자락과 마주하게 하는데…


파이란 장백지

강재야! 강재야! 머리 좀 써! 강재야 넌 왜 그렇게 사니?

조직의 보스이자 친구 놈이 구류를 살고 나온 이 강재의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나무란다. 구멍가게 아줌마에게 머리카락이나 쥐어 뜯기고 후배에게도 손가락질 당하는 이 강재란 놈은 배 바지에 빨간 마후라를 두르고 술만 처 먹으면 배 한 척 사서 고향으로 간다고 떠들고, 그러다 화딱지 나면 옆 사람이든 누구든 시비를 걸어 대판 싸우는 놈이다. 삼류 건달, 막가는 밑바닥 인생, 오줌 냄새 나는 뒷골목에 버려진 연탄재 같은 놈 이 강재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인생을 몽땅 저당 잡힐 거래를 한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잠깐 스쳐갔던 여인으로부터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분이고, 유일하게 사랑하는 분이라는 편지를 받는다. 어쩌란 말인가?

 

파이란 최민식영화 <파이란>은 가슴 밑바닥에 뭉쳐진 응어리들을 묵직한 감동을 길어 올리는 영화이다. 기실 영화의 스토리만을 보면 기존의 멜로 영화와 그다지 다르지는 않다. 막가는 인생을 사는 남자와 피붙이 하나 없이 외로운 여인의 엇갈린 사랑이야기를 우리는 꽤나 많이 보아왔었다. 스토리 뿐 아니라 영화는 곳곳에 풀지 못한 몇 가지 플롯 상의 오류들이 포진해 있다. 물론 <공동경비구역 JSA>나 <친구> 역시 플롯상의 오류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들처럼 <파이란> 역시 끈적끈적하고 피로한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을 육중하게 울려주는 면들이 있다.

그것은 기존 멜로 영화처럼 정확하게 눈물 코드만을 짚어 나가는 가벼움이 아니라 한동안 우리나라 멜로가 잊어버렸던 뒷골목 연탄재 같은 오염된 공간에서 사랑으로 인해 한 인간이 구원 받는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 것이다. 좀 더 잘 살수도 있었을 테지만 굳이 이렇게 살아와버린 자신에 대한 통곡, 한번쯤 바꿀 수도 있었던 삶을 끝내 놓쳐버린 것에 대한 오열이 거칠게 녹아 있다. <파이란>의 눈물은 여기서 출발한다.

 

파이란 중반부

영화 중반 부에서 이 강재가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본 적이 없는 나를 가장 믿고 따른다면서 송장이 되어 나타나면 어쩌란 말이냐'면서 오열하고, 비릿한 부둣가에 앉아 파이란의 편지를 읽으며 담뱃불 조차 붙이지 못할 만큼 절규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단 한 번도 회답하지 못했던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제까지 되는대로 막 살아 온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회한이다. 이 강재의 절규는 누구나 한 번쯤 내 인생의 빛 나는 한 줄을 긋고 싶었던 현대인들의 가슴을 매섭게 후려치고 있다.

 

한국영화 파이란<파이란>은 이 강재 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뒷골목 인생들의 삶을 그대로 여과 없이 통과해 나가고 있다. 이제까지 <친구>나 그 외의 굵직굵직한 영화들에서 보여졌던 뒷골목 깡패들의 세계는 실상 약간 과장된 면이 있었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파이란>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몇 명의 조직원들이 허름한 건물을 빌려 구멍가게에서 돈이나 뜯어먹으면서 살지 않는가. 그런 구질구질한 삶을 정면으로 통과해 나가면서도 잃어버린 희망에 대한 메시지를 과장되지 않게 전달하여 <파이란>은 가슴 속 밑바닥에 숨겨놓았던 실낱 같은 사랑을 울컥 치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파이란>은 소주가 필요한 영화이다.

 

영화 내내 지저분한 일회용 밴드를 붙이고 다니던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 딱 한 번 소년 같은 미소를 짓는데 그게 참으로 아름답다. 더러운 아스팔트에 핀 장미 같은 미소, 그 미소 하나가 <파이란>을 살찌우고 있다.

하루 담배 세갑 피우며 엇갈린 인연, 삶의 회한 눈물에 실어


최민식 연기이 남자의 눈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 결코 그 누구도. 17일 시사회를 통해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파이란>(송해성 감독-튜브 픽쳐스 제작)의 최민식. 머리 끝이 쭈뼛 서는 듯한 전율이 느껴진다. 파이란(장백지)의 유해를 품에 안고 통곡하는 장면. 유해 상자에 손이 갔다가 어쩔줄 몰라 다시 담배를 꺼내다 그리고 끝내 울음을 터뜨리는 그 장면. 최민식은 그 순간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다듬어지지도,액션 영화의 히어로처럼 멋지지도 않지만,그 날것 그대로의 연기로 관객들 가슴을 친다. 초라한 인생에 대한 때늦은 후회. 삶에 대한 회한,엇갈린 인연 그리고 떠나버린 이에 대한 원망,어떻게 이 모든 것을 절묘하게 녹여낼 수 있었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명연기다.

<파이란>에서 최민식이 맡은 역할은 인천 뒷골목을 누비는 건달 강재다. 같이 건달 세계에 들어온 친구는 벌써 조직의 우두머리가 됐는데,정 많고 눈물 많은 탓에 '삐끼'나 하고 있다. 그의 인생엔 도무지 희망이라곤 없다. 똘마니조차도 “형처럼 살라고 하면 죽어버릴거야”라고 말 할 정도다. 삼류건달로 망가져가는 최민식의 연기는 압권. 일수돈 받으러 갔다가 머리채나 뜯기고,오락실 아저씨한테 뜯어낸 동전으로 하루 종일 오락실에 죽치고 앉아 있는 모습 조차 아주 그럴싸하다. 헐렁한 '기지 바지'에 구식 셔츠,빛바랜 점퍼까지 총 동원한 최민식은 하루에 세갑 넘게 담배를 피워대며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러나 최민식을 가장 힘들 게 했던 부분은 인생 막장에 선 강재가 변화를 겪게 되는 지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세상 그 누구도 자기의 존재가치를 인정해 준 적이 없었는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죠. 이때부터 강재는 조금씩 내일을,희망을 보게 됩니다.”

어느날 살인을 저지른 보스를 대신해 감옥에 들어가달라는 제안을 받고 감옥행을 결정한 강재. 이 때 몇년 전 단지 돈때문에 위장 결혼해준 중국 여인 파이란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그녀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떠난 길에서 강재는 파이란의 맹목적인 사랑과 믿음을 뒤늦게 확인하면서 돌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는 설정.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정확한 연기가 필요했다. “파이란은 순수의 결정체고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에요. 강재는 파이란을 통해 자신조차 몰랐던 자기의 순수한 부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변화를 어떻게 표현할까 도표까지 그려가면서 고민했어요.” 지난 겨울 한파에 시달리며 촬영을 했다는 최민식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때 그 한기가 다시 스며드는 것 같았다고. “지금은 오래된 애인과 헤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징그럽게 고생도 했고 지겨워지기도 했는데. 막상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니 허무해지기까지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민식,결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될 듯. 그의 녹록하지 않은 연기는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게 확실하니 말이다.